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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물 빠진 호수의 밑바닥처럼 사람을 가라앉게 만드는 질척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거무죽죽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눈동자에 내가 비추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어내려 갔다.

 

정작 주변은 차갑게 식어내리기는커녕,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생각 없는 얼간이가 들이부은 휘발유에 담뱃불이 엉겨 붙으며 발생한 화재가 몇 분 전까지 우리가 있던 창고를 활활 불태워버린 탓이었다. 가까이서 느끼는 불길의 속살이란 뜨겁고 눈부시기 그지없어서, 나는 화재 현장에 두고 있던 눈동자를 굴려 위로 솟구치고 있는 시꺼먼 연기 쪽으로 올려보냈다.

 

“이봐, 아가씨.”

 

불길의 열기에 눈이 시큰해질 무렵,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나를 불렀다. 모든 것을 시꺼멓게 태워 먹듯 활활 타오르는 맞은편과 다르게 남자가 서 있는 곳은 아무런 빛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고 불길에 뜨끈하게 데워진 눈가를 식히며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미안하다.”

“.......”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떠올렸다. 남자는 어지간히 미안한 것인지 사과를 건네고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적대조직을 단신으로 박살 냈던 자라고 할 수 있을까. 남자는, 그러니까 하진성은 그 홀로만 본다면 나에게 있어 완벽하기 짝이 없는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문제는 내가 그를 바닷속에서 건져낸 인어공주도,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이웃나라 공주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굳이 칭한다면 인어공주가 제 언니들에게 받은 단도에 가까울 터였다.

 

“진성 씨.”

“내가 그렇게 일반인은 건들지 말라고 했건만....”

 

하진성의 중얼거림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달그락. 주머니 속에서 금속 특유의 묵직하고 서늘한 촉감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겨 주었다.

 

우습게도 이 상냥한 남자는 여즉 나를 피 한 방울도 제대로 본 적 없는 고명한 부잣집 아가씨로 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납치극에 이리 저자세로 나오지는 못할 일이었다.

 

나는 당신의 동료에게서 당신을 죽이라는 사주를 받았어요. 주머니 속에 있는 총을, 지금 숙이고 있는 당신의 머리통에 쏴 갈긴다면 모든 것이 끝나요. 당신은 밤새 앓던 불면증도 이겨낼 안식을 얻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괜찮아요.”

 

나는 하진성이 나를 오해하고 있을 마음 넓은 부잣집 아가씨를 흉내 내며 무해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대로 총을 꺼내 남자에게 겨눠야 했다.

 

하지만 손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미소를 짓던 입꼬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그와 반대로 하진성의 고개는 위로 올라갔다. 그는 내 애매모호한 표정을 보고는 무엇을 오해한 것인지,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지 않잖아.”

 

이 정 많고 상냥한 남자는 내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납치극에 잔뜩 겁을 먹었으리라 여긴 것이 분명했다. 하진성은 내 어깨를 작게 토닥이며 조심스레 나를 살폈다. 없던 눈물이 나올 정도로 따뜻한 온기에 나는 왈칵 눈물을 뽑아냈다.

 

이런. 하진성이 당혹스레 탄식을 내뱉었다가 허둥지둥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가씨, 뚝. 많이 놀랐어?”

 

만일 그가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는, 하진성은 지금처럼 나를 쳐다봐줄 수 있을까? 하진성의 새까만 눈동자에 걱정의 감정이 깃드는 것을 보자 덜컥 겁이 났다. 그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가씨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이렇게 상냥하게 달래주는 것일 테지.

 

하진성이란 남자는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는 놈 주제에 어디가 상냥하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으나, 무식하게 총구부터 들이대는 머저리 살인마들과는 다른 온기가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 상냥함이 같은 부류에게도 통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냈을 때의 하진성이 보일 낯을 상상했다가 그만 고개를 숙여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미안하다.”

 

남자는 내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였는지, 내가 당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모르는 것이 나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는 갑작스러운 내 감정 표출에 내가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건넸다.

 

“이런 관계로도 괜찮아요.”

“,..뭐?”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빠르게 훔치며 중얼거렸다. 화재 현장에서 넘어온 열기로 인해 눈물은 뜨거움을 머금고 있었다. 단지 울었을 뿐인데 헐떡거리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제발 나를 지금처럼만 봐주세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나는 눈물을 훔쳐낸 뒤 뜨끈하게 열이 오른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내 시야에는 오로지 하진성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당황한 듯 내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거두었다가, 이내 도로 뻗어 어깨를 꽉 잡아 왔다.

 

“내가 왜 너를 버리겠어.”

“그럼 약속해줘요.”

“무슨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약속해줘요.”

 

나는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었던 손을 빼내 허공에 들어 올렸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새끼손가락에 하진성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까닭 모를 결연함에 의아한 눈치였으나 구태여 캐묻는 대신 조용히 손가락을 엮어주었다.

 

남자에게는 물 빠진 호수의 밑바닥처럼 사람을 가라앉게 만드는 질척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 늪지대에 스스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의 거무죽죽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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