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G MAFIA AU
氷隙
빙극
빙하 표면에 생긴 틈
망설이지 말거라. 너는 살려주마.
그의 목소리는 악마가 속삭이는 듯이 달콤했고 빌어먹게도 잔인했다. 망설이지 말라는 말은 그저 사형선고에 불과했다. 조직에 잠입한 스파이를 뻔히 살려두기에는 쿤khun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뒷세계를 장악한 무자비한 마피아 조직은 집요하게 끄나풀을 뽑아내어 썩은 원두를 처리하는 듯 단호했다. 사람 목숨이 작은 원두 한 알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겠지.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으나 그의 손은 마음대로 따르지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자신을 압도했던, 사랑했던 사람이다. 쉬이 죽일 수 있을 만큼 매정한 사람이 되지 못했던 그는 결국 무릎을 꿇고는 쿤khun의 보스에게 애걸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너는 참으로 다정한 사람이구나.”
얼음장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온기에 그는 덜컥 오늘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보스는 그를 다시 여자에게 총구를 내밀게 하고는 낮게 속삭였다.
“쿤khun이 내리는 명령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오로지 쿤khun에 대한 복종이다.”
너는 실격이구나.
사형 선고였다. 보스가 손을 올리자, 총격이 울리더니 두 명의 인형人形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시시하군.”
백지처럼 새하얀 정장 위에 붉은 액체가 난잡하게 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자신의 조직원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그의 행동에도 그의 수행원들은 덤덤하기만 했다. 쿤khun이니까. 쿤khun을 위해서니까. 완벽한 쿤khun을 위해서. 보스, 쿤 에드안은 구두 굽의 소리를 내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어느덧 새벽이 붉은 해로 인해서 걷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 ∴ ∴
도시는 푸르스름하게 빛이 났다. 거리는 낙엽하나 없을 만큼 깨끗했으며 가로등은 우아하게 곡선을 그려 사람들의 저녁을 빛내었다. 그 중에서 검고 잘빠진 일명 비싸고 고급스러운 차에서 쿤 에드안이 내려서 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 때 움직이는 것은 그의 취미는 아니었지만 파티에 참석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그가 참석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단지 여자. 그의 외로운 빈자리를 달래줄 사람을 꿰여내기 위함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파티는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목구멍에 가벼운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에드안도 자연스럽게 귀도 따라갔다. ‘프리드리히에서 아가씨가 온다더군.’, ‘웬일이래, 지독히도 딸을 아낀다더니만 모습을 드러내고 말이야.’, ‘그러게 지금 나잇대면 뻔하지. 딸을 갑부에게 팔아넘기려는 듯이 결혼시키려는 목적이 뻔해.’, ‘하하하! 그렇군.’, ‘프리드리히면 얼굴 꽤나 반반할 텐데.’ 별 시덥지 않은 소리였지만 에드안의 흥미를 이끌기에는 충분했다. 프리드리히, 들어본 적은 있다. 이 도시에서 꽤나 유명한 자선사업가 집안. 그런 집안의 자녀라. 얼굴이 반반하다면 하룻밤을 꿰어내기 좋겠지만 온실 속에 자란 아가씨들을 상대하기는 지겨웠기에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다가오는 여성들에게 가볍게 농담을 하던 중이었다. 잔잔한 노래들 사이를 비집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여자. 긴 은발이 허리에 찰랑거리고 유행하는 드레스가 아닌 어쩐지 긴 정장과도 같은 우아한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은 어쩐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차림이었다. 저런 미색이라니. 반반한 정도가 아니었다. 여러 여성들과 하룻밤을 나누는 쿤khun의 보스, 에드안은 그 스스로가 눈이 높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채로운 빛깔을 자랑하는 사파이어와 같은 벽안이 샹들리에 아래에서 난반사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조차 시선을 뺏길 만큼 강렬했다. 그런 여자는 에드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맡은 편에 풀썩 앉았다.
휴.
짧은 한숨에서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단박에 알아낸 에드안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내뱉었다.
“따분한가?”
“……그렇다면 어쩔 거죠?”
조금 놀란 목소리. 에드안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그답게 오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에 잡은 지프 라이터를 이리저리 손장난하던 것을 멈추며.
“죽음을 자주 지켜본 사람은 인생을 따분하게 여기는 사람을 쉬이 알아차리는 법이지.”
그런 사람은 생에 대한 갈망도 없거든.
“그런 소리는 처음이네요. 이름이?”
역시 오만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연기같았지만 에드안은 모른 척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프리드리히 양,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야, 이미 성까지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소개해야하나요?”
“됐군. 내 이름은 모르는 게 좋다.”
그런 에드안의 말에 분한 듯이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노래는 어느새 빠른 곡조의 피아노곡으로 바뀌어있었다.
“프리드리히 루스.”
“…….”
“루스라고 불러요.”
“과한 치하군.”
“맞아요,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이 파티에서 내 이름을 부르게 허락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쿤khun의 보스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에드안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여자는 당연하듯이 품에 안았고, 마음껏 취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우스운 소리라니. 에드안은 그녀의 풋내나는 말에 비웃으며 속삭였다.
“쿤khun의 이름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녀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과 같은 표정. 그런 그녀는 상체를 숙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둘 만이 들리게 입을 달싹였다.
“에드안, 당신이야말로 너무 쉽게 힌트를 주는 것 아닌가요?”
뒷세계의 보스.
놀란 것은 에드안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놀랐다. 풋내가 나는 아가씨에게 그의 이름을, 정체를 들킨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죽일까. 눈이 부시게 빛이 나는 여자가 자신에게 드리운 검은 세계를 알아차린 순간, 제거하는 쪽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리춤에 숨겨놓은 총의 무게가 묵직했다. 오늘 새벽에 한바탕 갈겨댔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꺼내서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음에도, 그럼에도 어쩐지 거슬렸다. 여자를 죽이는 것이 난생 처음으로 껄끄러웠다. 이유를 몰랐다. 흥미로워서?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여자는 처음이라?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새파란 벽안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는 미인을 냅다 죽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서 열심히 굴리다가 취향대로 굴려 마지막에 버리는 것을 즐겼으니까.
“이런 아가씨가 내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죽이지는 말아요, 저는 제안을 하러 왔으니까.”
에드안은 파이프를 물고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초에 죽일 마음도 없었건만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별로 흥이 살지 않았다.
“제안이라 들어보지.”
저와 결혼해요.
결혼? 어리숙한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당돌한 제안이 입 안에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스임에도 잘 알고 있으면서 결혼을 제안하는 배짱. 실로 당돌하기 짝이 없다. 결혼이라, 정략결혼이라. 사교계에서 처음 나온 여자. 무언가 팔리듯이 결혼할 것이 뻔한 여자. 자선사업가의 하나밖에 없는 딸. 어떻게 되어서든 그녀의 의지에 상관하지 않고, 그의 아비는 다른 남자에게 결혼을 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에드안에게 제안할 필요가 없으니까.
“차라리 아비를 죽여달라고 하지 그런가?”
“……필요 없어요. 저는 아버지의 돈과 힘이 필요하거든요.”
“차선책으로 괜찮은 남편감을 찾는 거고.”
그게 하필 마피아 보스라는 것이 조금 우습구나.
루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오만하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녀는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홀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돈, 그리고 힘과 권력을 가져야해요. 결국 이 세계는 돈과 무력이 전부라는 소리에요. 저는 무력을 가진 자가 필요하고 당신은…….”
“내가 필요한 것은 없어. 교섭은 결렬이다.”
에드안은 입을 당겨 웃었다. 몸을 반쯤 일으켜 그녀에게 몸을 숙이고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프리드리히 루스. 너를 내게 준다면 그 제안을 허락해줄 수 있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빛나는 벽안에 가득 나를 담는다면, 너의 눈부신 외모가 오로지 나의 아래에서 움직인다면, 입을 맞추고 내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나에게 복종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것을 수집하고자 하는 욕구가 물씬 피어올랐다.
“……어떻게 한다면 당신에게 나를 줄 수 있죠?”
“쿤에게 하는 복종은 뻔해.”
내게 입 맞추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 나를 위해 춤추고 나를 위해 살아간다면 너의 소원을 이루어주지. 쿤 에드안의 말에 루스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가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사랑할게요. 저의 것이 되어주시겠어요? 그녀의 말 한마디가 빙하의 흠집을 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머나먼 후였다. 샹들리에 아래서 운명이 난반사했다.
